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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비보는깨돌 2025. 4. 29. 14:49

Ⅰ. 고구려의 기원

고구려를 건국한 족속에 대해 중국 문헌에서는 맥족(貊族)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맥(貊)이라는 글자는 선진(先秦) 문헌 여러 곳에 등장하므로, 일찍부터 맥족의 기원을 중국 북부에서 찾고, 이들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진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맥족은 고대 황하 유역의 주민들이 그 북방의 여러 족속을 지칭하던 일종의 통칭이었을 뿐, 특정 족속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중국 북부 족속의 이동에서 고구려의 기원을 찾는 것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고구려를 건국한 이들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현재로서는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積石塚) 기원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압록강 중류 유역에는 초기 형태의 소박한 무기단(無基壇) 적석총부터 장군총과 같은 웅장한 규모와 정제된 형식을 갖춘 계단식 적석총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양식의 적석총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 적석총의 기원을 요서 지역의 우하량(牛河梁) 유적 등에서 찾아, 홍산문화(紅山文化)를 이룩한 족속의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압록강 유역에 정착하고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을 요서 지역의 홍산문화에서 찾는 것은 양자 간의 시간적 간격이 매우 커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요동 지역의 적석총이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관전(寬甸)현과 봉성(鳳城)현 등지에서 발견되는 적석총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환인(桓仁)·집안(集安) 지역의 적석총과 연결되며, 청동기 유물의 양식 면에서도 공통점이 있어 주목됩니다. 또한, 토기에서도 압록강 유역의 토기와 요동 지역의 미송리형 토기, 길림 지역의 서단산문화 토기가 양식상 유사하여 주목됩니다. 이러한 점들은 고구려의 기원 및 고조선·부여와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 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원전 3세기 이후, 환인·집안 일대에는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철제 도끼는 벌목을 용이하게 하여 개간을 촉진하였고, 낫은 수확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중국 군현과의 교역도 활발해졌는데, 무기단 적석총에서 발견되는 명도전(明刀錢) 등의 화폐가 이를 보여줍니다. 철제 농기구 사용에 따른 농업 생산력 증대와 외부와의 교역은 압록강 중류 지역 주민 집단의 성장을 촉진하였고,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정치적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이 성숙하기 전에 한(漢) 제국의 침공으로 이 지역에 현도군(玄菟郡)이 설치되었습니다.

 

기원전 107년에 설치된 현도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토착민의 저항으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75년 이후에는 소노(消奴) 집단을 중심으로 고구려 연맹체가 형성되었으나, 그 집권력은 미약했습니다. 이후 계루(桂婁) 집단이 고구려 연맹체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계루 집단의 출현과 등장 과정에 대해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주몽(朱蒙)이 북부여에서 이주하여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부여의 중심지였던 길림시 일대에서 확인되는 무덤 양식은 석관묘(石棺墓)에서 토광묘(土壙墓)로 이어지는 것으로, 고구려의 적석총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또한, 부여 방면에서 이주한 집단에 의한 새로운 정치 체제 형성을 뒷받침할 만한 대규모 석관묘 무덤군이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과 주몽 설화의 기본 줄거리가 부여의 동명 설화(東明説話)를 차용한 사실을 지적하며, 학계 일각에서는 주몽 설화의 사실성을 부정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압록강 중류 지역 맥족의 묘제는 부여 지역 예족의 묘제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두 지역 주민의 분화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는 추정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지역 묘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삼국지》 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한 갈래라는 전승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는 부여 방면에서 이주한 집단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주몽 전승의 핵심 내용이 3세기 이전부터 전해져 왔음을 의미하며, 주몽 전승의 일정한 사실성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3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이러한 전승에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에 부여의 동명 설화 내용을 차용하여, 《광개토왕릉비》에 전하는 형태의 주몽 전승이 정립된 것입니다. 이후 고구려 후기에는 주몽이 북부여가 아닌 동부여에서 왔다는 기록이 덧붙여졌습니다. 압록강 중류 지역에 석관묘나 토광묘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사례가 없는 것은 계루 집단의 이주·정착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급격한 정복과 건국이 아니라 선주민과의 연합을 통해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에, 묘제상에서도 급격한 문화적 단층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점은 주몽 설화 자체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주몽이 모둔곡(毛屯谷)의 토착 수장들과 연합하고, 졸본(卒本)의 소서노(召西奴)와 결혼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합니다.

Ⅱ. 고구려 초기의 정치 구조

계루 집단이 압록강 중류 지역의 '나(那)' 집단들을 통합하는 과정은 대내외적인 어려움을 동반했습니다. '나' 집단 간의 상호 갈등과 대립, 한 군현의 무력 개입과 분열 책동 등으로 인해 1세기 중반까지 장기간 혼란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계루부 왕실 중심의 집권력을 확립한 인물은 태조왕(太祖王)이었습니다. 태조왕대에 이르러 여러 '나' 집단은 5부(五部)로 통합되었습니다. 이들 5부는 계루부 왕실에 의해 외교·무역권 등 대외 교섭권을 박탈당했으나, 집단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자체 관원을 두고 자치했습니다. 이들 고유 명칭의 부를 후대의 수도 행정 구획 단위인 방위 명칭의 부와 구분하여 '나부(那部)'라고도 합니다.

 

태조왕대 이후 고구려의 정치 상황은 각 부의 자치력과 중앙 정부의 집권력 간의 상호 관계에 따라 전개되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계루부 자체 내에서 왕과 다른 왕족 대가(大加)들 간의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왕권과 대가들의 권력, 중앙 정부의 집권력과 각 부의 자치력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기도 했으며, 여기에 중국 군현의 힘이 작용할 경우 집단적인 이탈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점차 왕권과 집권력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왕위는 초기에는 형제 상속의 모습을 보이다가 산상왕(山上王) 이후 부자 상속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이는 왕권이 안정되고 강화되었음을 의미하며, 그에 비례하여 왕족 대가들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자치적이었던 각 부에 대해서도 각 부 관원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는 등 통제를 강화해 갔습니다. 그러나 3세기 초까지도 소노부가 독자적으로 농업신과 지역 수호신 및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각 부는 독자적인 운동력을 상당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각 부 내부에도 하위의 작은 자치체들이 존재하여 부를 구성하는 단위를 이루었습니다. 연나부(椽那部)를 구성했던 4개의 하위 단위가 이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고구려 초기의 정치 구조는 자치체들을 층층이 결합한 형태였습니다. 왕권으로 상징되는 집권력은 이들 각 자치체를 결속하는 일차적인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왕권은 각 부의 자치력을 해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자치체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귀족 회의였습니다. 왕실의 대가들을 비롯하여 각 부의 수장들을 포함한 제가 회의(諸加會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회의체는 조정의 집권력을 보완하여 국가적 통합력을 높이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동맹제(東盟祭) 등의 제의 또한 국가적 통합력 유지에 중요한 기능을 했습니다. 동맹제는 일종의 추수 감사제였습니다. 매년 10월에 열린 동맹제에서는 일신(日神)과 농업신인 수신(隧神)에게 제사를 올려 한 해의 풍성한 수확에 감사하고, 다음 해의 풍년을 기원했습니다. 이 제의에서 왕은 최고의 사제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왕이 직접 주관하여 수도에서 개최된 동맹제에 각 부의 귀족들이 참여하는 것은 왕실의 권위에 복종하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제의 기간에는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다양한 놀이를 즐겼을 것이며, 문물의 교역과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5부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융합하고 사회적으로 통합되어 갔습니다.

 

한편, 태조왕대 이후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팽창하여 동해안의 옥저(沃沮)와 동예(東濊)의 여러 읍락들을 복속시켰습니다. 동북쪽으로는 두만강 유역으로 진출을 시도했고, 부여에 대해서도 공세적인 우위를 확보했으며, 일부 말갈(靺鞨) 계통 주민들을 복속시켰습니다. 서쪽으로는 요동군(遼東郡)과 현도군 등 한 군현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고구려가 정복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읍락 단위로 자치를 인정하고, 그 수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하며 공납을 징수했습니다.

 

대외적인 팽창에 따라 막대한 물자가 유입되었고, 이는 사회 분화를 심화시켰습니다. 후한(後漢) 시대의 철제 보습이 집안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3세기경에는 쟁기(犂耕)가 일부 지역에 도입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농경 기술의 발전은 생산력 증대로 이어져 사회 분화를 촉진했습니다. 2세기 후반 또는 3세기 전반에 고구려에는 좌식자(坐食者), 즉 지배 계급에 속하는 전사 단(戰士團)이 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화의 진전은 친족 집단 구성원 간의 공동체적 관계를 약화시켰습니다. 왕위의 부자 상속이 확립되고, 형사취수혼(娶嫂婚)이 점차 소멸되는 추세를 보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부(部)와 내부(內部) 등 자치력의 기반 또한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Ⅲ. 중앙 집권 국가로의 발전

4세기에 접어들면서 진(晉)이 쇠퇴하고 유목 민족의 이동과 정복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혼란기에 고구려는 급속하게 대외적으로 팽창해 나갔습니다. 미천왕(美川王) 14년(313)에는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병합하고, 이어 요동 평야의 지배권을 놓고 모용연(慕容燕)과 경쟁했습니다. 북쪽으로는 부여를 압박하여 길림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 팽창은 4세기 후반 서쪽에서 모용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남쪽에서는 백제의 공격을 받아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중앙 집권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소수림왕(小獸林王) 때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태학(太學)을 설립했으며, 불교를 공인했습니다. 또한, 고구려 국가와 왕실의 존엄성과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건국 설화를 정립했습니다. 주몽 설화는 이러한 건국 설화의 일부였습니다. 아울러 이 시기에 태조왕을 사실상의 시조로 삼았던 기존의 왕계에, 그 이전에 존재했던 추모왕(鄒牟王) 계통을 연결하여 추모왕을 시조로 하는 왕계를 정립했습니다. 이것이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왕계이며, 《삼국사기》에 전하는 고구려 왕계입니다. 건국 설화 및 왕계의 정립과 함께, 소수림왕대에는 역사서도 편찬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 구축은 제도적인 측면에서 관등제(官等制) 확립과 지방 제도 정비에서 그 일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세기까지의 부체제(部體制) 아래에서는 중앙의 왕실뿐만 아니라 각 부의 대가들도 자신들의 관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의 자치력이 소멸되고 각 부의 수장들은 제거되거나 중앙 귀족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들을 편제하는 일원적인 관등제가 마련되었습니다. 그것은 형류(兄類)와 사자류(使者類) 관등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3세기 말에 형류 관등이 나타났는데, 4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분화되어 14등 관등제로 완성되었습니다. 관등제에서는 5등급인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과 6등급인 대사자(大使者) 사이에 계층이 나뉘는데, 이는 출신 신분에 따라 승진에 일정한 제한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방 행정 단위가 설치되던 초기에는 대체로 원고구려 지역인 5부 지역에서는 5부의 자치력이 소멸된 이후, 5부를 구성했던 하위 단위인 곡(谷)과 같은 비교적 작은 곳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새롭게 정복한 지역에는 교통로를 따라 주요 거점에 성을 쌓고, 보다 넓은 지역을 관할하는 지방관이 파견되었습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새로 병합한 변경 지역에 '수사(守事)'가 파견되었는데, 광개토왕대에 북부여에 파견된 영북부여수사(令北夫餘守事) 모두루(牟頭婁)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강 유역의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사가 파견된 지역의 행정 단위 명칭은 일반적으로 성(城)이라 했지만, 아마도 어느 시기에는 '군(郡)'이라고도 했던 것 같습니다. 무관직에 '군두(郡頭)'가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고구려는 5세기 후반 한강 유역 전체를 차지한 후, 이 지역에 군에 상응하는 16개의 성을 두었습니다. 군급(郡級)의 성 아래에는 현급(縣級)의 소성(小城)이 있었고, 그 아래에 촌(村)이 있었습니다. 군현이라는 명칭 자체를 사용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지방 지배의 형태와 성격 측면에서 볼 때 군현제(郡縣制) 시행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군현제 시행은 해당 지역의 인민과 토지를 중앙 정부가 직접 장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고구려 초기에 피복속민들을 읍락별로 예속시켜 공납을 징수하던 간접 지배 방식과는 뚜렷한 차이를 나타냅니다.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지방 제도 운영과 민에 대한 구체적인 지배 양상을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 보이는 '전사법(佃舍法)', '소녀(小女)', '적성연(赤城烟)' 등은 고구려의 율령에 따른 조치였던 것을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직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비록 전사법 등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를 통해 지방관을 통한 지역 지배가 기본적으로 율령에 의해 규정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5~6세기에 고구려 영토 내 여러 지역 간에는 발전의 불균등성이 상당히 컸고, 주민 집단 간의 차이도 컸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까지 지방관을 통한 율령적 지배가 광범위하게 시행되었을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농경이 발달한 선진적인 지역에서는 지방관을 통한 지배가 확립되었을 것이며, 그러한 방향으로 지방 지배가 발전해 나갔을 것임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5세기 초 이후의 고구려는 이전 시기나 6세기 후반 이후와는 달리, 중국 및 몽골 고원의 국가들과 백 년 이상의 긴 기간 동안 직접적인 무력 충돌 없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는 당시 고구려의 강한 국력이라는 주체적 조건과 함께,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다원적인 세력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객관적 여건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대외적인 평화와 안정은 고구려 영역 내에 포함되어 있던 다양한 문화를 지닌 여러 계통의 족속들을 융합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데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Ⅳ. 6세기 이후의 고구려

고구려의 대내외적인 정세는 6세기 중반 이후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안원왕(安原王) 15년(545) 양원왕(陽原王)의 즉위를 둘러싼 귀족들 간의 무력 충돌은 이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내분을 틈타 양원왕 7년(551)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 유역을 공격했습니다. 이어 북제(北齊)와 돌궐의 외교적, 군사적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이러한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고구려 귀족들은 타협을 통해 내부 분열을 수습했습니다. 그 결과, 실권자인 대대로(大對盧)를 귀족들이 선출하는 귀족 연립 정권 체제가 수립되었고, 이 체제의 기본적인 틀은 고구려 말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주요 국정은 1등급인 대대로에서 5등급인 조의두대형에 이르는 고위 귀족들의 합좌 회의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귀족 연립 정권 하에서도 중앙 집권 체제는 유지되었습니다. 고구려 말기에 수도는 5부로 나뉘어 있었고, 지방은 176개의 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중 62개의 큰 성은 욕살(褥薩)과 처려근지(處閭近支)가 성주로서 도독(都督)과 자사(刺史)에 비유되었고, 현령(縣令)에 비유되는 누소(婁肖)가 통치하는 나머지 작은 성들이 그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병렬적인 존재인 욕살과 처려근지는 군정과 민정을 모두 관장했으며, 주요 지방관의 치소인 성은 군사적 거점이기도 하여 행정 조직이 군사 조직적 성격을 함께 지녔습니다. 지방관은 관내의 민에게 인두세(人頭稅)를 부과하는 것 외에도 빈부의 차이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눈 호조(戶租)를 부과하여 조세 제도가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소수 귀족에 의한 이러한 과두 체제는 대대로 선출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무력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은 이러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6세기 중반의 대외적인 위기는 신라와 비밀리에 화약을 맺어 한강 유역과 동해안을 포기하는 대신 남부 국경선 안정을 꾀하고, 주력을 서북쪽으로 돌려 돌궐의 침공을 저지함으로써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6세기 후반 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몽골 고원을 장악하는 등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고구려의 안위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수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고구려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팽창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수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고구려 휘하의 일부 거란족과 말갈족이 수나라로 이탈했고, 나아가 수는 고구려의 완전한 복속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전쟁을 선택했고, 이후 통일 중국 제국과 고구려 간에 각국의 운명을 건 장기간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한편, 신라와의 전쟁도 치열해졌습니다.

 

고구려와 수·당(隋·唐) 간의 전쟁과 한반도 내에서의 신라와의 전쟁은 처음에는 각각 진행되었으나,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이 두 흐름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종국을 향해 빠르게 전개되었습니다. 즉, 보장왕(寶藏王) 4년(645) 당은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가 패배했습니다. 이후 당은 단기적인 원정으로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장기적인 소모전으로 전환하여 소규모 부대로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하여 고구려를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남부 국경선에 제2의 전선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한편, 이 시기 신라는 백제의 공세로 영토를 크게 잃자 고구려와 화약을 맺어 난국을 타개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평양성에서 있었던 김춘추(金春秋)와 연개소문의 담판이 결렬되자,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갔습니다. 마침내 신라와 당은 강력한 군사 동맹을 맺었고, 그 결과 백제가 먼저 멸망했습니다. 이제 고구려는 남쪽과 서쪽에서 강력한 적을 맞이하게 되었고, 백제 멸망으로 자유로워진 신라군의 지원을 받아 당군은 겨울철 작전까지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수·당 군대가 가진 최대 약점인 긴 보급선 문제는 크게 보완되었지만, 반면 고구려의 전략적 위치는 치명적으로 약화되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들이 벌인 내분은 고구려의 멸망을 더욱 앞당겼습니다.

Ⅴ. 고구려의 멸망과 그 역사적 의의

보장왕 27년(668)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 영역은 일시적으로 당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한반도에 침입한 중국 왕조가 이 땅에 통치 기구를 설치한 것은 이것이 두 번째였습니다. 첫 번째는 기원전 108년 한 제국이 1년여의 공방전 끝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왕검성(王儉城)을 함락하고 평양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낙랑군은 그 후 400여 년 동안 존속했습니다. 이번에는 당 제국이 평양성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수와 당 두 왕조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하는 데에는 70여 년이 걸렸고, 그나마 신라의 도움을 받아서야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안동도호부는 불과 8년 만에 신라에 의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연이 아닙니다. 삼국 시대를 거치면서 고대 한국 사회가 모든 면에서 성장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주도한 것이 바로 고구려였습니다.

 

기원전 108년과 기원후 676년 사이, 즉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부터 신라의 한반도 통일까지의 기간은 고구려의 존속 기간과 거의 일치합니다. 이 시기에 고구려가 이룩한 제도와 문물은 백제와 신라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통일 신라와 발해에 계승되었습니다. 한편,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었던 말갈족의 여러 집단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들을 성장시키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사는 고대 동북아시아 지역의 여러 족속과 문화가 합류하고 다시 흘러나갔던 거대한 호수와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