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역사 아카이브
조선초기의 여진 본문
조선 초기의 대여진 정책은 회유책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이는 사대교린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사대의 예를 갖추었지만, 여진의 여러 추장 및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 영주들과는 교린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사대 관계는 국가 대 국가의 1:1 관계였으나, 교린 관계는 1대 다수의 관계로, 당시 통일되지 않았던 여진 사회의 특성상 여러 추장들을 개별적으로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성격을 띠었습니다.
세종대에 이르러 조선의 사대교린 정책이 확립되었는데, 이는 조공을 중심으로 한 상하 관계였습니다. 세종은 조선을 중심으로 중국, 일본, 만주를 포함하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주도하려 했으며, 여진족의 여러 추장들에게 조선과의 조공 관계를 맺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조공 관계가 점차 정치적 의미보다는 경제적 이해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조선은 여진족의 조공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동북면 출신으로, 고려 말 왜구를 물리치는 데 동북면 사병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성계는 여진족 동화 정책을 추진하여 조선과 여진의 관계를 원만하게 했으나, 태종대에 조사의 난을 계기로 여진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태종은 회유 정책을 통해 여진족을 복속시키려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여진의 침략을 막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으며, 태조대와 같은 국토 확장을 위한 동화 정책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여진족은 지리적으로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 나뉘며, 조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건주여진이었습니다. 종족적으로는 오도리족, 오랑캐족, 우디캐족으로 나뉘는데, 건주여진은 오도리와 오랑캐,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은 우디캐족에 속했습니다.
건주3위는 이러한 종족 구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건주본위는 주로 파저강 일대에 거주하는 오랑캐 세력이었고, 건주좌위와 건주우위는 두만강 중류와 목단강 상류 일대에 거주하는 오도리족이었습니다. 원래 오도리 만호부는 두만강 중류 오음회 지역에 정착하여 조선에 복속했었습니다. 태종은 오음회의 오도리 만호부 대추장 퉁멍거티무르를 회유하여 관계를 돈독히 하고, 동북면 일대의 여진족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한편, 오랑캐 세력은 압록강 지류 파저강 일대에 자리잡고 명에 복속하여, 명의 남만주 경략 정책에 이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과 명이 남만주 경략을 둘러싸고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명나라는 만주 지역의 여러 여진족을 복속시킨 후 위소를 설치하고, 여진족 추장들에게 조선 입조를 금지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나 조선 변경의 여진족들은 생필품 확보를 위해 조선에 입조하여 관직을 받기도 했습니다. 명은 건주, 해서, 야인여진을 통할하기 위해 누르칸도사를 설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진족의 자치에 맡기는 기미 정책을 폈습니다.
압록강 유역의 오랑캐 세력과 두만강 유역의 오도리 세력은 각각 명과 조선에 복속하여 남만주 지역의 통솔권을 두고 대립했습니다. 이후 명은 퉁멍거티무르를 회유하여 건주좌위를 설치하게 했으나, 퉁멍거티무르 사후 오도리족은 건주본위의 오랑캐 세력에 합류했습니다. 건주좌위의 주도권을 두고 다툼이 벌어진 후, 명은 건주좌위를 나누어 건주우위를 새로 설치하면서 건주3위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진족은 조공을 통해 회사물과 상사물을 받았지만, 조공 무역만으로는 부족한 생필품을 충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제한된 기간 동안 북평관에서 개시가 허락되었으나, 여진 사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따라서 여진족은 변경을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고, 이를 막기 위해 변경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고 여진의 토산물을 수입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이를 '각장'이라 불렀고, 조선 시대에는 '무역소'라 칭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여진이 거주하던 동북면 일대에 각장을 설치하여 교역했으며, 고려와 여진 간의 교역은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 역시 동북면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여진과 교역을 계속했습니다. 태종 6년에는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여진족에게 소금, 철 등 생필품을 공급했는데, 이는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공식적인 교역 장소를 한정한 것으로, 실제로는 민간 차원의 사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태종 6년 경성·경원 지역에 무역소가 설치된 것은 혐진우디캐 김문내 등의 경원 침입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이 경원의 개시를 폐지하여 생필품 확보가 어려워진 것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이후 15세기 중엽 5진이 설치된 이후에는 5진 부근에 거주하던 성저 야인들이 조선인과 교역하면서 별도의 무역소 설치 필요성이 줄어들었습니다. 5진의 성저 무역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야인들은 조선인과 사무역을 하고 내지의 여진인들에게 물건을 되팔기도 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원칙적으로 사무역을 금지했으나, 후시 형태로 성행하여 청대에는 회령 개시가 공인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명나라도 여진 사회의 중국 물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요동 변방에 '마시'라는 무역소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여진족의 침입과 약탈을 방지하고, 군용으로 필요한 북방의 말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조선은 귀순하여 시위하는 여진인에게 가사와 토지를 하사하고 노비를 지급하여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했습니다. 또한 이들에게 결혼을 장려하여 주로 각사 소속의 공노비 출신 처녀나 함경도 토호의 딸을 아내로 맞게 했습니다. 함경도 지역은 일찍부터 여진인과 조선인이 혼인하는 경우가 많아, 여진 추장이 조선 여성과의 혼인을 요청하면 함길도 토반 가문에서 처녀를 선발하여 시집을 보냈습니다.
조선은 향화·시위하는 여진인을 매달 6차례 예조에 모아 명부를 파악하고, 관직이 있는 자는 본위에 출사시켜 고과를 받아 승진 또는 파출시켰습니다. 그러나 일반 관리처럼 조하, 조참에 참여하거나 수문 등의 잡역에는 차임되지 않았습니다. 가사나 노비를 지급받더라도 본인 대에는 마음대로 매매할 수 없었고, 자손 대에 이르러서야 매매가 가능하도록 하여 향화한 여진인을 한 곳에 오래 정착시키는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향화자(조선에 투항한 여진인)와 시위자에 대한 우대는 조선의 회유 정책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은 향화자에게 가사와 토지를 지급하고 3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입조한 여진인 중 유력한 대추장의 자제들에게는 서울에 머물며 무관직을 받도록 장려했습니다. 이를 '유경 시위' 또는 '야인 시위'라 했는데, 이는 일종의 인질 정책으로, 여진 실력자를 복속시키고 배반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시위자는 여진인 중 무예가 뛰어나거나 실력을 갖춘 대추장의 자제 중에서 선발하여 관직에 임명하였고, 주로 정2품이나 정3품의 중추원 관직을 수여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유경 시위자가 소수였으나, 세종 5년 이후 자원 시위자가 증가하여 20~30인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여진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여진 추장의 자제들이 생활 안정을 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유경 시위자를 20~30명까지 두었으나, 시위 기간과 생활 형편에 따라 대우 규정을 정하여 그 수를 제한했습니다. 이러한 조공과 유경 시위는 근본적으로 여진의 경제적 곤란과 생필품 부족을 해결하여 침입을 막으려는 회유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