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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근현대

19세기 조선의 대외 관계와 개화

테레비보는깨돌 2025. 4. 16. 13:47

19세기 말, 서구 열강에서 동양으로의 진출이 본격화되며 조선 역시 서구 세력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을 선두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새로운 항로를 따라 동양으로 진출하며 식민지 경쟁을 벌였고, 이는 조선 주변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영국은 인도를 점령한 후 중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아편전쟁(1840-1842)을 통해 홍콩을 할양받고 주요 항구를 개항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프랑스 역시 중국과 황푸 조약을 체결하며 유사한 이권을 획득했고, 제2차 아편전쟁(1856-1860) 이후에는 영국과 함께 톈진 조약, 베이징 조약을 강요하여 추가적인 이권과 내륙 포교 및 통상 권한을 얻어냈습니다.

 

한편, 육로를 통해 동진하던 러시아는 19세기 중엽 이후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펼쳐 중국과의 아이훈 조약(1858)과 베이징 조약(1860)을 통해 연해주 일대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건설하며 극동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국 역시 18세기 말부터 태평양을 건너 극동으로 진출하여 난징 조약 직후 망하 조약(1844)을 체결하며 중국 진출의 기반을 마련했고, 페리 제독의 강압적인 외교를 통해 미일수호통상 조약(1854)을 체결하여 일본을 개항시켰습니다.

 

이러한 서구 열강의 중국에서의 침략 활동은 연행사절들의 보고를 통해 조선에 간헐적으로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보고는 피상적이고 신속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조선은 연행사절들이 북경에서 수입해 온 서적, 특히 중국인들이 서양의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하기 위해 저술한 *해국도지(海國圖志)*나 영환지략(瀛環志略) 등을 통해 서양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해국도지는 미국을 부강하고 공정한 나라로 묘사하며 서양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서적들의 유입과 함께 최한기의 *지구전요(地球典要)*와 같은 새로운 지리서들이 편찬되면서 1840-1850년대 조선의 위정자나 지식인들은 서양 정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고 발달된 기술을 수용하여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개화사상이 서울의 일부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특히 박규수는 미국의 공정함과 부강함을 들어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외세의 위협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잔반 출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인 동학이 최제우에 의해 창도(1860)되어 서학(천주교)에 대항하며 사회 변동 속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서구 열강의 극동 침략의 주요 무대는 중국과 일본이었지만, 조선 역시 그들의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18세기 말부터 서양 선박들이 조선 연해에 출몰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군함의 제주·울릉도 해역 측량(1787), 영국 탐험선의 동해안 탐사(1897)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중국 개항 이후 서양 선박의 출몰은 더욱 잦아졌고, 1850년대에는 러시아와 미국 선박도 등장했습니다. 조선인들은 이 거대하고 빠른 서양 선박들을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렀고, 낯선 외모의 서양인들을 '외이(外夷)', '양적(洋賊)' 등으로 칭하며 경계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원칙적으로 표류민들에게는 식량을 제공하고 송환하는 등 관대한 태도를 취했지만, 해로 탐험이나 연안 측량 등을 목적으로 온 서양인들의 약탈, 살인 등의 난폭한 행동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상 요구(1832)나 프랑스의 선교사 처형 항의(1846) 등에 대해 조선은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는 서양 세력의 의도를 불신하고, 천주교를 내응 세력으로 간주하며 탄압하는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은 전제왕권 강화를 목표로 내정 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서양 세력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병인박해(1866)를 통해 천주교를 탄압하고 서양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척화 정책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척화 정책은 병인양요(1866)라는 프랑스 함대의 침략을 불러왔지만, 대원군은 척화 의지를 확고히 하며 프랑스군에 맞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의 척사론은 국론을 통일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이항로의 척사론은 화이관에 입각하여 서양과의 조약 체결과 통상을 반대하고, 침략에 대해서는 실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1868)은 조선인들의 배외 감정을 더욱 격화시켰고, 이는 신미양요(1871)라는 미국 함대의 침략으로 이어졌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을 빌미로 조선과 수교를 시도하던 미국은 강화도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의 통상 조약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양요를 겪으면서 조선의 척사·쇄국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지만, 위기 속에서도 박규수, 오경석 등을 중심으로 개국 통상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존재했습니다.

 

대원군 집권기 조선의 대일 정책 역시 강경했습니다. 메이지 정부의 수립을 알리는 일본 측 서계 접수를 거부(1868)하고, 쓰시마 도주가 담당해 온 교린 업무의 이관 통보 역시 거부(1872)하면서 양국 간의 국교는 단절되었습니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화에 박차를 가하는 일본을 경계하고 거부하려는 대원군의 의도가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친정을 시작(1873)하면서 대일 정책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국왕과 척족 세력은 일본과의 관계 회복을 원했고, 일본 역시 운요호 사건(1875)을 빌미로 강화도로 사절을 파견하여 통상 조약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조정 내에서는 대원군과 유림을 중심으로 강력한 반대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일본의 군사적 위협 앞에서 조선은 결국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부산, 원산, 인천에 항구를 개항하게 됩니다. 이는 박규수의 건의와 중국의 권유 또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중국의 조일 수교 권유는 조선과 일본 간의 분쟁 확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일본의 조선 진출을 우려하는 속내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류큐를 병합(1879)하자 중국은 위기감을 느끼고,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에 서양 여러 나라와의 수교를 권고하는 밀함(1879)을 보냈습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을 통해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을 견제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조선은 처음에는 중국의 수교 권고를 거부했지만, 일본에 수신사 김홍집을 파견(1880)하여 상황을 살폈습니다. 김홍집은 일본에서 주일청국공사 허여장과 참찬관 황준헌으로부터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수교해야 한다는 연미론과 그 내용을 담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전달받았습니다. 조선책략은 고종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수교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했고, 조선은 미국과의 수교 의사를 중국에 전달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했습니다.

 

정부 내에서도 조선책략을 중심으로 미국과의 수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의정부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고종은 이홍장으로부터도 서양 여러 나라와의 수교를 권고받고(1880), 마침내 미국은 물론 서양 여러 나라와 수교할 뜻을 중국에 통보(1881)했습니다. 이를 위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1880)하는 등 초기 개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책략과 연미론, 그리고 개화 정책에 대한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신사척사운동, 1881)과 대원군 계열의 쿠데타 모의(안기영 사건, 1881)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홍장은 조선 국왕으로부터 대미 수교 방침을 통보받기 직전, 유학생 파견을 빙자한 대원의 파견을 요청하는 밀함을 조선에 보냈습니다. 조선은 영선사 파견을 결정하고 이를 중국에 알렸습니다. 이홍장은 미국 해군 제독 슈펠트를 초청하여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논의했고, 조선 역시 영선사 김윤식을 파견했습니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홍장은 조약문에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명문화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슈펠트의 반대로 이는 좌절되었고, 대신 조선 국왕의 속방 조회로 대체하는 것으로 합의하여 가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1882). 이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강화도 조약에 비해 불평등성을 최소화하고 장차 개선의 여지를 남겨두었으며, 미국이 조선의 분쟁 발생 시 원조하고 중재한다는 조항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조약 체결 후 이홍장의 막료 마건충이 조선에 와서 조약을 최종적으로 체결하고 속방 조회를 받아냈습니다. 조선의 고종과 일부 소장 관료들은 전통적인 조공 체제하에서 청국의 비호를 받으며 미국 등 우호적인 국가와 수교함으로써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을 견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조미 조약상의 속방 조관 삽입은 실패했지만, 이홍장은 조선과 체결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에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명시했습니다. 임오군란(1882) 이후 청군이 진주하고 수륙 무역 장정이 체결되면서 중국의 조선 내정 간섭은 본격화되었고, 이는 점차 강화되었습니다. 이에 조선은 외세를 이용하여 중국의 간섭을 극복하려 했고, 보빙사의 미국 파견(1883)이나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와의 수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조영 수호 통상 조약(1882)과 조독 수호 통상 조약(1882)은 조미 조약 직후 체결되었지만, 불평등한 내용으로 인해 비준이 지연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중국을 배제하고 영국과 직접 협상하여 치외법권 삭제와 관세 인하 등을 반영한 새로운 조약을 체결(1883)했지만, 영국은 주청 공사에게 주조선 공사를 겸임시키는 방식으로 중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행사를 외교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고종과 개화파는 러시아, 프랑스와의 수교를 추진하여 중국의 간섭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조로 수호 통상 조약(1884)과 조불 수호 통상 조약(1886)이 체결되었고, 특히 조로 조약은 조선이 러시아에 급속히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럽 여러 나라와의 조약 체결은 조선이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조약을 체결할 때마다 중국의 간섭으로 인해 속방 조회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러한 속방 조회는 청일 전쟁 이후 중국 세력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1890년대 후반에 가서야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