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역사 아카이브
조선의 건국과 유교정치 본문
유교는 삼국시대 이래 정치 지배층의 기본적인 교양으로 자리매김하며 정치 및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하지만 유교가 국가 정치의 지도 이념으로 확고히 정착된 것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13세기 말, 원나라로부터 신유학인 주자학(송학, 정주학, 성리학이라고도 불림)이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이전의 유학은 한·당 유학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당시 유학의 목표는 유교 경전과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정치·법률 제도를 숙지하여 정치에 적용할 수 있는 훌륭한 관리가 되는 것과 뛰어난 문장 능력을 갖추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향(1243∼1306)이 원나라에서 유행하던 주자학을 들여와 연구한 이후 백이정, 이재현을 거쳐 이숭인, 이색, 정몽주, 길재, 정도전, 권근 등 걸출한 주자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여말 선초의 유학은 한·당 유학의 학풍과 주자학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송학의 학풍을 모두 아우르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공민왕 대에 성균관과 과거 제도가 부흥하면서 주자학은 관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새로운 정치 철학으로 각광받았으며, 공민왕 이후 과거를 통해 주자학을 학습한 신진 관료들이 관직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주자학이 고려에 처음 수용될 당시 유학자들은 불교에 대해 전면적인 배척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리상 유사점을 들어 유교와 불교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유학자들은 불교 사원의 폐단과 승려들의 비행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민왕 원년(1352)에 이색(1328∼1396)은 사찰의 남설과 승려의 과다 등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는 사원과 승려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이었으며 불교 자체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색의 공적은 척불 운동보다는 양유 운동에 있었습니다. 공민왕 16년에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자 김구용, 정몽주, 박선중, 이숭인 등 뛰어난 인물들을 학관으로 겸임하게 하여 성균관을 중심으로 주자학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 말의 척불 운동은 항상 성균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원·명 교체기에 친명 정책을 지지했던 정몽주, 박상충, 정도전, 김구용, 이숭인, 권근 등은 사상적으로 척불양유의 선봉에 섰습니다. 특히 정몽주(1337∼1392)는 당대 유림의 존경을 받던 거유로서 향교를 새로 짓고 처음으로 《주자가례》에 따라 사서인들에게 가묘를 세울 것을 권하는 등 유교 진흥에 큰 공을 세웠으나, 척불 운동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척불 운동은 공양왕 3년(1391) 4월 공양왕이 구언교서를 내린 것을 계기로 본격화되었습니다. 구언에 따라 5월부터 대사성 김자수, 성균관 박사 김도, 정당문학 정도전 등 이성계 일파는 상소를 올려 불교가 백성의 고통과 국가 재정 궁핍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불교 사원의 경제적 비대함과 횡포, 승려의 과다와 비생산성을 비판했습니다. 이때 가장 적극적으로 척불을 주장한 인물은 정도전(1342∼1398)이었으며, 그는 척불의 실제적인 근거를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확고히 파악한 척불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유학자 및 신진 사대부들은 새로운 관료 세력으로 등장하여 고려 사회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불교를 비판하고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신진 관료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발생했는데, 이는 그들이 처한 입장의 차이와 더불어 주자학이 내포한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주자학에서는 인륜, 특히 명분을 절대적으로 중요시하는 동시에 정치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실천 또한 강조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 말의 유학자 및 관료들 사이에서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고려 왕조의 정치·사회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국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세력 간의 대립이 나타났습니다. 정몽주와 길재 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정도전과 조준 등은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고려 말의 신진 관료들은 주자학으로 교양되었고 불교를 배척했으며, 권문세족이나 구세력과는 이해관계가 상반되었으므로 구 사회·구 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들에 의해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되어 조선 왕조가 개국되었고, 조선 왕조는 유교를 정치 지도 이념으로 삼는 유교 국가로서의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의 왕으로 즉위하였고, 12일 후 즉위 교서를 반포했습니다. 즉위 교서의 서두에서 이성계는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국호를 그대로 고려로 유지하며 의장과 법제는 모두 이전 고려의 관례를 따를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급격한 변화로 인한 정치적·사회적 동요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즉위 교서에는 새로운 왕조의 기본적인 정치 방향과 백성의 편의를 위한 약속, 우현보와 이색 등 56인의 반이성계파 인물에 대한 처벌, 그리고 사형수를 제외한 범죄자들에 대한 특별 사면령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네 번째 조항은 “관혼상제는 국가의 중요한 법이니 예조에 명하여 경전을 상세히 연구하고 고금을 참작하여 법령으로 정하여 인륜을 두텁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도록 하겠다”라는 내용이었고, 여섯 번째 조항은 “충신·효자·의부·절부는 풍속에 관계되니 권장하는 바가 있다. 해당 지역의 관사에서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면 우대하여 등용하고 그들의 마을에 정표하겠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전자는 《주자가례》와 관련된 조항으로 보입니다. 당시 사서인의 가례는 전통적인 방식과 불교식이 혼재되어 있었을 것이므로 갑자기 《주자가례》에 따르겠다고 선언하면 이에 대한 거부, 저항, 마찰, 충돌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여 완곡하게 경전과 고금을 참고하여 관혼상제의 의례와 제도를 정하겠다고 했으나, 결국 《주자가례》 즉 유교적 의례에 따를 것임을 표명한 것입니다. 후자는 유교 도덕의 근본이 되는 삼강오륜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사서인의 일상 의례는 《주자가례》에 따르고 사회의 도덕 규범은 삼강오륜으로 삼는 유교 사회, 유교 정치를 지향할 것을 즉위 교서에서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즉위 교서는 정도전이 작성하여 태조가 검토한 후 반포한 것이므로 유교 사회 건설은 태조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정도전 등 신진 유학자들의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개국과 태조 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정도전은 새로운 왕조의 이상적인 정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태조 3년(1394)에 《조선경국전》을 사찬하여 태조에게 바쳤습니다. 《조선경국전》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치 체제와 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는데, 그 방향은 유교 정치와 유교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유교 정치는 덕치, 인치, 왕도 정치의 실현을 이상으로 삼습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정치의 근본을 ‘인(仁)’이라고 강조하며, 인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치 체제는 주나라의 총재, 즉 재상 중심의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에서는 총재에게 정치의 실질적인 권한이 부여됩니다.
총재의 직책은 위로는 임금을 보필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솔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치의 성패는 총재의 현명함에 달려 있고, 현명한 군주를 얻는 것은 총재를 잘 선택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인주의 직책은 현명한 재상을 선택하는 데 있다(人主之職 在擇一相)’고 논했습니다. 이는 군주의 패도와 독재 정치를 방지하고 자신과 같은 재상들에 의해 주도되는 정치를 유교 정치의 이상적인 체제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조 4년에 정도전이 《경제문감》을 찬진한 것 또한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치 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며, 《경제문감》의 상을 재상만으로 구성한 것을 보더라도 그의 재상 중심 정치에 대한 강한 집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도전을 비롯하여 이성계를 추대한 유학자적 관료들의 학문과 사상의 경향, 그리고 그들의 유교 정치 실현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조선 왕조는 건국 초부터 유교를 정치의 지도 이념으로 삼게 되었던 것입니다.